가야사. 김해를 가야(伽倻) 너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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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가야설의 문제점

6가야 설은 고려 초의 전승이고, 실제로는 10여 개국 이상의 가야소국이 있었음
가야사라고 하면 보통 금관가야, 아라가야와 같은 이른바 ‘6가야’의 이름을 떠올립니다.

그러면 가야는 6개의 작은 국가(小國)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소국들의 이름이 ‘무슨 가야’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6가야의 이름이 처음 실린 자료는 고려 말에 편찬된 <삼국유사> 5가야 조의 기록입니다. 이를 살펴보면, 실제로는 아라가야(阿羅伽耶), 고령가야(古寧伽耶), 대가야(大伽耶), 성산가야(星山伽耶), 소가야(小伽耶), 금관가야(金官伽耶), 비화가야(非火伽耶) 등의 일곱 가야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런 이름들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가락국 수로왕 건국 신화에 덧붙여진 6란(六卵) 설화에 덧붙여진 것인데, 그 6가야의 개념은 신라 말 고려 초의 혼란기에 후고구려나 후백제와 같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가야' 형태의 국명은, 그들이 소국으로 존재할 당시의 국명이 아니라, 옛날에 가야연맹 중의 하나인 금관국(金官國), 아라국(阿羅國), 고동람국(古冬攬國), 성산국(星山國,) 비화국(非火國)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신라 말 고려 초의 명칭입니다.

고려 초의 인식은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삼국유사>에 나열된 7개의 가야소국 중에서 일부는 옛날에 실제로 가야연맹체 속에 들어 있던 소국이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게다가 가야 토기의 출토 범위를 통해서 보면 가야연맹체를 이루는 소국의 수는 6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10개국이 넘습니다.

김해가락국의 위상

대성동 고분군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 조'의 기록에 의하면, 3세기 당시에 한반도 남부지역에는 24개의 소국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12개의 소국을 변한(弁韓)이라 하고, 나머지 12개의 소국을 진한(辰韓)이라고 하였습니다. 김해의 구야국(=가락국)은 변한 12국 안에 들어 있으며, 그 변한 12국으로 이루어진 연맹체를 가야사에서는 ‘전기 가야연맹(前期加耶聯盟)’이라고 부릅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서는 4세기 이전의 낙동강 유역에서 김해 가락국의 대표성이 인정됩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맹주국은 김해의 가락국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고학 자료들을 비교해 볼 때, 1~4세기 당시 가야지역의 문화 중심은 김해, 부산, 창원을 둘러싼 경남 해안지대였고, 그 중에서도 김해 지방의 출토 유물은 다른 지역에 비해 압도적인 우월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전기 가야 소국들은 상당한 통치 체제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대체로 비슷한 문화 기반 속에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구야국과 같이 지리적으로 해상 교통에 유리하고 비교적 큰 소국이 대외적인 교섭의 대표 역할을 맡곤 하다가, 차츰 소국연맹체가 형성되었습니다.

가야연맹의 형성 시기는 2세기 후반 정도로 볼 수 있으며, 아무리 늦어도 3세기 전반을 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3~4세기에 변한 12국은 김해의 가락국(=가야국=구야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변한 소국연맹체, 즉 전기 가야연맹을 이루고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 당시 맹주국인 가락국의 위상은 길이 10미터가 넘는 대형 목곽묘들로 구성되어 있는 김해시 대성동 고분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야의 발전 기반

가야국의 발전 기반은 선진적인 제철 기술과 활발한 해운 교역 청동거울

전기 가야연맹이 3세기 경에 김해의 가락국을 중심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기반으로 우선 지적될 수 있는 것은 해상 교통 입지 조건입니다. 3세기 당시의 『삼국지』 '위서 왜인전' 과 조선 후기 『택리지』의 기록으로 보아, 김해는 물결이 완만한 남해 및 서해의 해로를 이용하여 서해안과 남해안의 모든 항구와 교통할 수 있었고, 낙동강 입구로부터 거의 평형에 가까운 수로를 거슬러 올라가 내륙 각지와 연결할 수 있었으며,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의 쓰시마 및 북부 규슈로 향하는 출발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김해의 가락국은 낙동강 유역 소국들의 관문(Gateway)과 같은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었습니다.

문헌 기록뿐만 아니라 출토 유물로 보더라도, 김해 지방에서는 중국에서 가져온 청동거울과 중국 화폐인 오수전(五銖錢) 등이 발견되며, 일본에서 가져온 토기인 하지키와 벽옥제 석촉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즉, 김해의 가락국은 중국의 낙랑군, 대방군으로부터 한반도 각지 및 왜를 연결하는 중개 무역의 중심지였던 것입니다. 한편 가야 지역 발전의 또 하나의 원동력은 이 지역에 철산지가 상당히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조선 초기의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김해 감물야촌과 창원 불모산의 사철 생산과 합천 야로의 철광 등을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지』 '위서 동이전' 에도 변한의 철이 한, 예, 왜, 및 중국의 낙랑군과 대방군에 공급할 정도로 유명하였다고 합니다.

하자키 백옥제 석촉 납작 도끼 덩이쇠
창원, 김해, 부산 등지의 대형 목곽묘에서 다량의 납작도끼(板狀鐵斧)와 덩이쇠(鐵鋌) 등이 출토되는 것은, 그 지역에 존재하는 풍부한 철광자원의 존재와 연결시켜 보아야 합니다. 김해의 가락국은 선진적인 제철 기술을 보유하고 이를 토대로 한 철 생산과 이에 바탕을 둔 대외 교역의 중심지로서 가야연맹의 발전을 선도하였던 것입니다.

전기가야 해체와 영향

전기 가야연맹 해체는 한반도 전체와 일본의 고대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침 구지봉

세기에 가야연맹은 중국 남조, 백제, 왜를 연결하는 국제 교역망 속에서 활동하였으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신라와 경쟁하였습니다. 반면에 신라는 고구려에게 후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400년에 고구려 광개토왕이 군사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였습니다. 가야연맹의 대표 세력인 임나가라(김해시)는 대규모의 군대를 맞아 대항하지 못하고 갑작스러운 멸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가야사로서는 매우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이것이 한반도 및 동북아시아의 고대사에서 파생되는 영향은 매우 컸습니다.

첫째로, 전기 가야연맹이 해체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결과입니다. 가야 소국들이 모두 망한 것은 아니지만, 성주, 창녕, 부산 등 낙동강 동쪽 지역의 소국들이 신라의 수중에 들어가고 낙동강 하구의 주요 세력들이 초토화되었습니다.

둘째로는 백제가 바다를 통하여 왜와 교역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백제는 5세기 들어 영산강 유역의 세력을 지원하면서 이를 통하여 왜와의 교역을 지속해 나갔다고 보입니다. 신라는 가야와 왜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났으나 고구려의 정치적 간섭에 한동안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셋째로는 가야연맹 내의 후진 지역이었던 경상 내륙 지방과 왜가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야의 문화 중심지였던 낙동강 하구의 주민들이 흩어져 경상 내륙 지방과 일본 열도 등으로 이주하면서, 제철 및 철기 제조 기술, 도질토기 제조기술 등이 전수되었다고 보입니다. 혹자는 가락국의 지배 세력이 일본열도로 집단 이주한 것을 가야의 쇠퇴 원인으로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5세기에 가야의 선진 기술이 외부로 파급되어, 고령을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이 형성되는 토대를 이루고, 일본 열도에 천황제 정권의 토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일본의 천손강림 신화에서 천손이 하늘로부터 규슈(九州)의 ‘구시후루다케(久士布流多氣)’, 즉 구지봉(龜旨峰)에 하강한다는 내용은, 김해 세력의 파급과 관련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후기가야사 개관

전기 가야연맹 해체는 한반도 전체와 일본의 고대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침 지산동 고분군

경상북도 고령 지방에는 본래 큰 세력이 없고 안정된 농업 생산성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5세기에 들어 야로(冶爐) 철광을 개발하면서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고령 지방에 4세기 이전의 고분 유적이 거의 없다가 5세기 이후에 지산동 고분군과 같은 대형 고분군이 나타나는 것은 그를 반영합니다.

그리하여 고령의 반파국(伴跛國)은 5세기 후반에 대가야(大加耶)를 칭하며 대두하여, 13개 소국을 거느린 맹주국이 되어 후기 가야연맹(後期加耶聯盟)을 형성시켰습니다.

대가야는 479년에 가라왕(加羅王) 하지(荷知)의 이름으로 중국 남제(南齊)에 사신 보내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의 칭호를 받기도 하고, 481년에는 신라를 공격하는 고구려의 군대를 백제와 함께 가서 막아 주기도 하였습니다.

고령 대가야 금관

그러나 대가야는 6세기 초에 기문(己汶=남원,임실)과 대사(帶沙=하동) 지방을 둘러싸고 백제와 대립하여, 기문을 빼앗기고 대사를 지켜냈습니다. 대가야 이뇌왕(異腦王)은 522년에 신라 왕녀를 받아들여 결혼동맹을 맺었으나, 신라 법흥왕은 이를 이용하여 분란을 일으켰습니다. 그 결과 530년대에 가야 남부의 일부 지역이 신라와 백제에게 병합되거나 그 영향 아래 들게 되었습니다.

후기 가야연맹은 540년대에 고령의 대가야국과 함안의 안라국을 중심으로 한 남북 이원체제로 분열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대외적으로는 가야연맹 전체의 독립을 모색하였으나, 결국 550년 경에 백제에게 반(半)복속되었습니다. 가야연맹은 554년에 백제와 연합군을 구성하여 관산성 전투에 나섰다가 신라에게 대패하였으며, 562년에 신라 군대의 기습적인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습니다.

가야의 멸망원인

700년 이상 지속되었고 풍부한 고분 문화를 남긴 가야가 왜 멸망하였는가?
1970년대 이후로 경상남북도 지역에서 많은 가야 고분이 발견되었고, 그 안에서 풍부한 문화 유물들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가야 문화는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낙동강 유역에서 발전하기 시작하여, 기원후 2세기 무렵에는 12개의 소국이 나타났고, 3-4세기에는 김해 가락국 중심의 전기 가야연맹이 번성하였으며, 5-6세기에는 고령 대가야국 중심의 후기 가야연맹이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700년 이상 독립적인 체제를 유지하면서 신라와 대등하게 발전하던 가야가 어째서 멸망하였을까요? 가야의 멸망 원인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가야 지역의 소국들은 농업 및 해운 입지조건이 서로 대등한 상태에 있어서, 소국 간에 비교적 고른 문화 축적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중의 어떤 하나의 나라가 결정적으로 탁월해지는 것을 서로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둘째로, 4세기의 국제정세 변동을 거치면서, 4세기 말에 고구려의 군대가 낙동강 유역까지 쳐내려왔는데, 이는 가야가 발전하는 맥을 한동안 끊어놓았습니다.

셋째로, 가야는 주변의 백제나 신라에 비하여, 기존의 맹주국이 주변 소국들을 일원적으로 영도해 나가는 중앙집권 체제를 마련하는 것이 늦었습니다. 그래서 대외관계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습니다.

넷째로, 가야의 힘은 철 생산 능력의 우월성에 있었으나, 5세기 이후에는 왜국이 철광산 개발에 성공하고 백제가 왜와 직접 통교하기 시작하면서 왜에 대한 상대적 우월성이 약해졌습니다.

위에 말한 네 가지 요인은 상호 연관을 가지면서 가야 멸망의 원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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